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 (문단 편집) === 제2공화국의 출범 === [youtube(bMjS7Ogwj4A)]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 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과도내각을 수립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서울시내 치안 유지를 계엄군 외에도 각급 학교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4월 27일 허정 권한대행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시민들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요청했고 예컨대 시경과 종로경찰서는 동국대학교가 담당했다.] 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youtube(rNGa9Tv6Eyw)] ||[[파일:attachment/419-6.jpg|width=10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1960%EB%85%84_5%EC%9B%94_29%EC%9D%BC_%EC%9D%B4%EC%8A%B9%EB%A7%8C.jpg|width=100%]]|| ||<-2>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가는 이승만을 신문 보도한 [[경향신문]].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집이 무너진 [[이기붕]]은 이화장으로 도망친 28일 장남 [[이강석(1937)|이강석]]의 자결 총격에 의해 일가족이 모두 [[동반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일가족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지만 확실한 것은 불명이다. [[야인시대]]에서는 일단 영상으로는 이승만에 양자로 들어갔던 큰아들 이강석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걸로 묘사했으며 나레이션을 통해서 타살이라는 설도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승만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던 이승만은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린 나머지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1962년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그의 귀국을 막았다. 1962년 3월 17일 박정희는 "AP보도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가 귀국에 앞서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하는데 사과문을 발표하였건 아니하였건 정부의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하여서는 안 된다고 총영사에 지시하라. 사과문을 발표하더라도 거기에 대하여 국민의 감정이 풀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1962년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한국일보는 "혁명재판이 진행 중이며 혁명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서 구 정치인들의 다수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게 될 심사업무가 개시되려는" 때라고 하는 시점을 문제 삼았으며, 경향신문은 "전비(前非)를 완전히 뉘우치지 못한" 걸 반대 이유로 제시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쪽] 참고로 망명은 사진에서 배웅하고 있는 허정 권한대행의 주도로 각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이승만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하와이에서 잠시 쉬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크]]가 오기 전에 곧 돌아오겠다'''"고 허세섞인 너스레를 부렸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1960년 6월 방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